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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우/사회

천안문 6.4 운동의 마지막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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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4일 중국인 정치인 후야오방의 사망한 이후  천안문 광장 등 여러 곳에서 인민들이

벌인 시위를 중국 공산당이 유혈 진압한 사건이다.

천안문 사태

6월 3일

광장의 진입을 시도한 대부분의 군대는 무기는 소지하지 않았지만 일부 군인들을 무기를 소지하여

군중의 큰 분노를 샀다. 인민들은 군인들의 무기를 꺼내 공개하며 공산당 정부가 무력을 행사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인민들은 무기를 싣고 베이징으로 향하던 군인들의 버스를 막고 군인들을 끌어냈다.

인민대회당을 집결한 군인들은 명령에 따라 다시 버스로 올라가려 했지만

끌려 내려지자마자 수많은 인민들에게 포위되었다.

군인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앉았고 인민들은 곧 혁명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군인들은 이에 맞서 군가를 불렀다. 이는 긴장이 고조된 인민들과의 충동을 촉발시켰다.

6.4 천안문

폭행을 당해 피를 흘리는 사람들은 광장으로 올라가서 군인들의 행동을 규탄했다.

저녁이 되어서야 군인들은 인민대회당에서 철수하였다. 하지만 이때 상급부대에서는

전격적인 공격을 하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군대는 장갑차를 동원하여 천안문 광장으로 진격하였고 인민들은 군대가 누구를 위한 군대냐며 분노했다. 

광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장안 거리 등 모든 거리에서 군대는 인민들에게 가로막혔다.

하지만 이번에는 군대도 후퇴하지 않았다.

군대가 사격을 하였지만 인민들은 실탄이 아니라 고무탄 인줄 알았다. 군대가 자국민에게

실탄을 발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였다.

총에 맞은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고 잠시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와 군대에 욕을 하며 저항했다.

총소리는 사람들을 도망가게 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은 거리로 나오게 했다.

장안 거리에서 군대는 바리케이드에 가로막혔고 인민들은 화염병과 돌을 던졌다.

인민을 위한 해방군이 인민을 향해 총을 쏘며 진격을 계속하였고 인민들은 그들에게

살인마, 도살자라며 욕설과 비난을 했다.

늦은 밤 장갑차 한대가 단독적으로 광장에 진입했다. 인민들은 장갑차의 진입을 막기 시작했다.

화염병을 던져 장갑차는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지만 멈추지 않고 그 순간 군대의 통고 방송이 있었다.

방송에서 공산당 정부는 이미 어떤 결과가 생기더라도 폭동을 진압하겠다고 하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10만 명이 넘게 모여있던 인민들은 공포감을 느끼고 순식간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군대는 이때 이미 천안문 성루와 광장 사이에 있는 장안가의 사이에 도착했을 때였다.

발포는 하늘을 향해 위협을 하는 것이 아니었고 사람을 향해 발포를 시작했다.

광장에서 총에 맞아 구급차를 외치는 사람들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천안문사태

군대를 저지하려 했던 시위대는 물론이고 길을 가던 사람들도 부상을 입었다.

새벽이 되었을 때는 군대는 천안문 광장을 포위하였지만 기념비 부근으로 모인 수천 명의 

시위대는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중 일부는 군대와 접촉하여

광장에서 철수할 시간을 달라고 말하려고 하였고 시위는 이제 그만할 것을 설득하였다.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함이었다. 

군대와 접촉을 한 이들은 다시 기념비로 돌아와 시위대와 대화를 하였는데

여기에서도 의견이 갈라져 있었다. 

시위 존속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논쟁을 하는 동안 인민대회당에서

나온 부대는 기념비 쪽으로 향했다.

논쟁을 하던 시위대는 시위를 지속하려는 인원이 더 적었기 때문에

시위대 지휘부는 철수를 지시하였다.

6월 4일. 광장을 점령한 지 20일이 지나서야 최후까지 남은 학생들과

교사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은 천안문 광장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이후 며칠 동안 시위는 계속되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