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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우/사회

실미도 특수부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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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특수부대(684부대) 창설은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부대의 청와대 습격 사건에서 비롯된다.

당시 한국 군인 및 경찰 등에서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김신조 청와대 습격 

31명의 무장공비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는 이후 전향하여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는 반공 집회가 열렸고 이 사건을 계기로 4월 1일 200만 명의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여 북한의 후방 침투를 대비하였다.

학교에서도 교련 시간을 도입하여 기초적인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실미도 부대의 창설도 이와 같은 시대상황의 산물인 것이다.

김일성 암살을 목표로 한 실미도 부대는 무기수, 사형수뿐만 아니라 사회 하층민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작전은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부대의 창설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중앙정보부대 부국장 이철희가 하였고

관리는 공군 정보부에서 맡았다.

부대 인원도 김신조 무장공비와 똑같이 31명으로 구성되었다.

실미도 위치 / 출처 구글맵

당시 훈련을 맡았던 기간병들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 일과는 6시에 기상하여 6km 산악구보를 시작으로 사격, 폭파, 호신술 등을 훈련받았다.

실미도 부대원들은 지속적인 사격 훈련으로 어떤 목표물이라도

100% 명중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북한에 가서도

살아 돌아올 수 있을 만큼 그들의 자신감은 충만한 상태였다고 한다.

또한 국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그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훈련에 임했다고 한다.

훈련 중에 7명이 사망하였지만 그들은 끝까지 목표 달성을 위해 버텼다.

출정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부대원들은 68년 8월로 예정되어 있던

계획이 취소된 것을 계기로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고

여러 문제가 하나둘 터지기 시작했다.

기간병 보다 나이가 많았던 실미도 부대원들의 하극상이 발생하고

인접한 섬인 무의도에 가서 부녀자를 겁탈하였다.

그들 중 2명은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나머지 한 명은 실미도에서 죽었다. 

하지만 실미도 부대의 김일성 암살 계획은 계속 미루어졌고

시간은 흘러 3년이 지나도록 그들을 방치하였다.

부대를 창설했던 중앙 정보부장 자리는 김형욱에서 이후락으로 

바뀌었고 이후락도 특별한 지시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남북과의 관계가 화해 모드로 돌아서고 있었고

1970년 8.15 선언을 기점으로 평화통일을 위한 방향으로 대북 노선이 변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남북회담을 계기로 실미도 특수부대의 필요성은 사라지게 되었다.

1971년 8월 23일, 06시경 실미도 훈련병들은 기간병을 향하여 총을 난사하였고

24명 중 6명만 살아남았다.

훈련병들은 무의도로 가서 위급한 상황이라고 속이고 배를 빌려 탈출을 하였다.

12시경 인천 송도역 삼거리에서 버스를 탈취한 훈련병들은 

13시경 인천 옥련 고개에서 출동한 군대와 교전을 한다.

이후 다른 버스를 탈취하여 서울로 향하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추격하던 경찰관과 버스를 멈추려 했던 경찰관 모두 그들이 쏜 총에 순직을 하였다.

14시경 버스 운전사는 탈출을 하였고 그들이 직접 버스를 운전하였다.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교전 이후 버스는 가로수와 충돌하여

멈추게 되었고 이들은 수류탄으로 자폭을 하였다.

실미도사건

대간첩작전본부는 15시 30분 무장공비의 신분을 공비라고 발표했지만

18시에는 정래혁 국방부 장관이 죄수들의 난동이라고 발표했다.

이틀 후 국방부 장관과 공군참모총장이 사퇴하며 이 사건을 서둘러 덮었다.

국회에서도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이후 실미도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훈련병중 생존자 4명은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을 당하게 된다.

 

여기서 발생하는 의문은 그들은 왜 버스를 탈취하고 서울로 향했는가 하는 부분이다.

박정희를 암살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각자 서울로 향하고 청와대 앞에 집결하여

급습하는 것이 암살 성공을 높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침투 훈련을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버스를 탈취하여 이목을 끌어 제지당할 것을 예상했을 것이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희생하려고 그동안의 고된 훈련을 참고 견딘 그들이

있었음 알리려고 한게 아니었을까..